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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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2)
  • 새금산신문
  • 승인 2019.07.1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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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호 금산문화원장
장호 금산문화원장

전주성에서 후퇴한 안국사혜경 부대가 먼저 북문에 있는 방어사군을 공격하고 뒤이어 성안에 있는 소조천융경 부대와 후방에 있는 안국사혜경 부대가 고경명의 진을 포위하고 협공한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 의병부대는 후방의 안국사혜경과 전방의 소조천융경의 협공을 받아 서로 후퇴와 전진을 하면서 의병부대 본진이 있는 눈벌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와중에서 의병장 고경명이 위급하게 처하게 되자 그의 종사관 안영과 유팽로 등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경명은 그의 둘째 아들 인후와 더불어 모두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특히 유팽로의 경우 자신은 건마를 이용하여 위기를 탈출하여 왔으나 주장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말을 달려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안영과 함께 노령의 의병장 고경명의 몸을 감싼 채 적의 칼날을 받아 최후를 같이 하였다.

고경명 순절 후 고경명 큰아들 종후는 수일 후 순절한 아버지의 시신과 다른 시신을 거두어 각 고향으로 보냈으며 본인은 뒤에 의병을 조직하여 진주성 싸움에 순절하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금산성 1차 전투가 없었다면 웅치를 넘은 안국사혜경과 이치를 넘은 소조천융경이 전주성에서 합류하여 공격하였다면 과연 전주성이 온전하게 보전되었을까 생각을 한다. 또한 만약 전주성이 함락 하였다면 권율의 이치대첩과 조헌의 연곤평 싸움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금산성 1차 전투가 임진왜란 초기의 전세를 바꾸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판단을 한다.

한편 금산성 1차 전투를 기리는 고경명순절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8)가 금성면 소재지에서 금산방향으로 690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1km 지점 양전리 왼편 나지막한 고개의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제봉 고경명은 명종 13(1558) 문과에 장원한 후 벼슬이 동래부사에 이르렀으나 서인이 몰락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관주에서 모집한 의병 약 6천명을 이끌었고 1592710일 금산 눈벌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아들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효종 7(1656) 금산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짓고 선생이 전사한 건너편 산기슭에 비를 세웠는데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비석 파편을 와가 비각 안에 정리하여 두었다가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하였고 1962년에는 석조비각을 건립하였다. 선생의 묘역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에 있다.

 

2) 2차 금산성 전투에서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 연곤평 싸움

조헌 선생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태어나 호를 중봉이라 하였다. 명종 21(1566)에 함경도 온성도호부 훈도에 제수되고 1년 뒤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에 제수되어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하였다. 선조 원년 (1568)에 정주목의 교수를 거친 뒤 파주목의 교수 그리고 선조 4년에 홍주목의 교수로 부임하여 토정 선생을 만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교류하였다. 선조 17(1584)에 붕당간의 정쟁으로 파직된 중봉은 서울을 떠나 옥천군 안읍 밤티 산 속에 후율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임진왜란이 있기 전부터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대비할 것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53일 옥천에서 열읍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을 모아 의병운동에 나섰다. 자신의 문인 김절, 김약, 박충검 등과 더불어 1,0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74일 공주에서 기치를 세우고 호서의병을 대표하는 창의기병을 하였다.

영규대사는 속성이 박씨로서 공주 판치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계룡산에 입산 하여 서산대사의 법문에 들어가 호를 기허당이라 하였다. 귀에 서봉사, 갑사 등의 주지를 지낸 뒤 공주 청련암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전란이 있을 것으로 예측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전국적인 승군이 모집된 것은 조정에서 승통을 설치하고 승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묘향산에 있는 휴정을 부른 이후 15927월부터이다. 영규는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중에서 가장 먼저 갑사에서 수백 명이 봉기하였다.

당시 왜군이 천안, 직산 등지를 제외한 충청도 동부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고 순찰사 윤선각의 질시로 인해 조헌의 의병활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그러나 조헌을 주축으로 한 호서의병이 공주의 승장 영규와 적극적인 협력으로 청주성 수복전투에 임하였다. 당초 호남의병장 고경명과 협력하여 근왕을 위해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미 고경명이 710일 금산성 1차 전투에서 순절하여 관군 등과 협력하여 청주성 전투에 임한 것이다.

당시 방어사 이옥은 연기현 동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말경에 청주 쪽으로 진출하였고 승장 영규는 청주성 15리 밖 안심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승군은 청주성 빙고현에 의병군과 합류하여 81일 서문을 공격하였다. 수차례공격을 하였으나 소나기가 내려 군사를 물러가게 하였지만 성중의 적들은 지속적인 관의승연합군 공격으로 그날 밤 그들의 시체를 태운 뒤 깃대를 세워 군사처럼 보이게 한 뒤 모두 성을 빠나갔다. 날이 밝기 전에 성안에 진주한 관의승연합군은 무혈로 청주성 수복에 성공하였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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