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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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3)
  • 새금산신문
  • 승인 2019.07.2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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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 호 금산문화원장
장 호 금산문화원장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도내에 응거하고 있던 왜군의 주력을 몰아낸 조헌은 이제 의병활동의 목표를 근왕하는 데 두어 북상하려 하였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을 점령한 적세가 매우 위급함을 알고 양호의 순찰사로부터 먼저 금산을 공격할 것을 요청받게 되어 전열정비를 위해 공주로 돌아갔다. 공주에 돌아 오니 휘하의 군사들 다수가 순찰사의 방해공작으로 모두 흩어지고 700명의 의병만이 종군을 경의하였다. 이에 앞서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818일을 기하여 금산을 향해 일제히 협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중봉은 816일 회덕을 거쳐 유성으로 진군하여 다시 승병 영규군과 합세하고 금산성으로 향하였다.

 조헌의 700순의군과 감사에서 출발한 영규의 800여 승병군이 유성에서 만나 흑석리를 거처 당시 공주와 금산의 경계인 조중봉 아래에 머물었다. 17일 조헌의 연합군은 압재를 넘고 문암 맹티를 넘어 어남동을 지나 당시 진산군의 영역인 머들령을 넘어 금산군과 진산군의 경계인 삽재에 이르렀다. 삽재는 금산군 대암리와 진산군 장대리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옛 삽재성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많은 전투가 있었다. 조헌과 영규의 의승연합군은 17일저녁 당시 금산성10리 쯤 되는 와여벌리(瓦余伐理) 또는 와여평(瓦余坪)이라 부르는 마을의 큰 둔턱골과 작은 둔터골 그리고 인접한 새터 가마실 둔전들에 진을 치고 그 곳에서 권율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권율은 818일 금산성을 공격하기에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기일을 미루자고 회통을 하였지만 받지를 못하고 진군을 하였다. 권율의 연락이 없고 비가 와서 제대로 진영을 갖출수가 없었다. 그러자 영규는 "군사는 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는 것인데 진영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내일은 싸울 수가 없겠습니다." 라고 하니 조헌은 "이 적은 우리가 본래 대적 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내가 속히 싸우려고 하는 까닭은 오직 충의의 격동으로 시기가 한창인 이 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18일 새벽이 되자 조헌은 금산성을 향하여 진군을 하였고 영규는 진영을 대강 끝내고 있을 때 금산성에 잇던 왜장 소조천융경과 안국사혜경이 이끄는 왜군이 5대로 나누어 공격을 하였다. 조헌의 순의군은 이미 금산성 6리 쯤 인 연곤평(벗들)에 다다르고 있엇을 때였다. 조헌은 연곤평 뒷산인 경양산을 중심으로 진을 짜서 대응하려고 하였으나 진영을 갖추기 전에 적이 기습을 하였던 것이다. 왜군이 의승연합군의 수효가 적고 후방부대의 지원이 없으면서 진영조차 제대로 짜지 못한 연곤평 한 가운데서 접전을 하였다. 들판에서 벌어진 싸움은 백병전으로 전개되어 살상한 수효가 서로 비슷하였다. 이어 적의 대군이 계속 몰려오는데 조헌의 군사가 잠시 물러나 영규의 진으로 옮겨 들어가는 순간에 왜군이 뒤에서 다시 밀어닥치니 조헌의 순의군이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런 중에도 맨손으로 치며 싸웠으나 적세는 좀 처럼 꺽이지 않았다. 얼마 후 조헌이 난병 속에 죽음을 당하니 승군이 영규에게 말하기를 "조의장은 죽고 적은 더욱 많은 병력이 몰려오니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규는 크게 부르짖어 말하기를 "죽으면 죽지 어찌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왜군을 무찌르며 싸우다가 그 또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의승연합군 모두 다 싸우다 죽었을 뿐 감히 물러나 산 사람이 없었다. 조헌과

영규의승연합군은 이처럼 왜군을 맞이하여 세 번에 걸쳐 온 몸으로 맞서 크게 싸우다 모두 순절하였다.

 왜군도 금산성 수성전이 아니라 들판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뜻 밖에 많은 사상자를 냄으로 군세가 크게 꺽여 잔병을 거두어 금산성으로 후퇴하였고 적병들의 곡성이 가득한 가운데 쌓인 시체를 태우는데 그 불길이 3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한편 적의 공격으로 쓰러진 영규는 기절을 하였다가 눈을 뜨니 배의 상처가 매우 깊었다. 사력을 다해 복수 미륵사를 거쳐 갑사로 가던 중 820일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서 끝내 순절하였다. 그리고 왜군이 물러난 틈인 822일 조헌의 문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서 경양산록에 큰 무덤을 만들었다. 이른바 이곳이 금산의 의로움을 드높인 칠백의총이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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