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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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의병의 활약(4)
  • 새금산신문
  • 승인 2019.07.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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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 호 금산문화원장
장 호 금산문화원장

3) 3차 금산성 전투 변응정 선생 소산 횡당촌 싸움

변응정은 무과에 급제하여 월송 만호와 선전관을 거쳐 해남 현감으로 부임하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해전에서 적을 격멸한 공으로 전라수사가 되었으며 해안지역은 이순신 활약으로 안전하였지만 육로로 왜군이 전주성으로 침범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변응정은 각주현군에 격문을 보내어 의거할 것으로 촉구하고 부하군졸을 정비하여 북상하였다. 김제에 도착하여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78일 웅치전투에 참가하여 싸우던 중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었다.

이치대첩이 끝난 뒤 전주성 점령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금산성을 비롯한 곳곳의 왜군 참탈을 볼 수 없어 충청, 전라 관의병연합군을 편성 금산성에 있는 왜군을 818일 공격하기로 조헌과 약속하였다. 818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조헌과 영규의 순의군과 의승군이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어찌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도 이렇게 죽지 아니하고 배신한단 말인가." 하고 전라도 의병장 소행진과 함께 즉시 군사를 이끌고 금산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금산성 서쪽 10리 횡당촌 뒷산에 진을 치고 금산성 2차 전투 9일 후인 27일 금산성을 공격하였다. 왜군이 금산성을 나와 대응하니 부하 장졸을 독려하여 싸우다 금산성 북쪽 2리에 있는 소산 학골에 이르러 포위되었다. 그렇지만 중과부적으로 모두 소산에 순절하고 말았다.

금산성 3차전투를 끝으로 왜군이 호남공격을 포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되는 창의군의 공격으로 916일 금산성에 있던 왜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옥천과 성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개령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임진왜란 초기(1592.6.23.~8.27)에 금산성을 비롯한 금산지역에서 5차례 전투는 이순신장군의 제해권 장악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승패를 좌우한 전투로 평가를 받고 있다. 금산전투는 단순히 금산 지역에서 성공한 전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전략상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군사적으로 전라도 지방이 보전되어 후방 병참기지로써의 역할을 할 수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전주사고에 보관된 태조의 영정은 물론 조선왕조실록 등의 각종 역사자료가 보존되어 오늘날 조선 당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하여 왜군의 군량미 비축을 제지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민생의 파탄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과는 이후 전쟁의 전개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볼 때, 금산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임진왜란 전략 상 매우 중요하였다고 정의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금산전투는 임진왜란사에서 관군, 의병, 승병이 합세하여 항전한 것은 유례가 없다고 평가를 하고 왜군이 침입 때부터 패퇴할 때까지 한 달 여 동안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공격한 것도 금산전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산전투에서 특별한 점은

 '갯터전투의 권종 아들 준 '

 '눈벌전투의 고경명과 둘째아들 일후'

 '연곤평전투의 조헌과 아들 완기'

 등 부자간이 순절하였으므로 충효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금산은 임진왜란에서 항전한 상징적인 곳이며 수많은 의사들의 순절로 왜군을 패퇴시킨 전적지로 금산전투는 임진왜란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그 항전의 유적지와 기념물은 민족사의 교훈으로 길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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