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과 권상현 그리고 금산의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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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과 권상현 그리고 금산의 천주교
  • 새금산신문
  • 승인 2019.08.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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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 호 금산문화원장
장 호 금산문화원장

먼저 천주교를 이야기하기 전에 고려 말에서 시작되어 조선조 말까지 이어온 성리학과 이것에 반발 되어 생겨난 실학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고려 때 국교인 불교에 대항해 주자전서를 가져와 연구하여 불교를 폐하고 유교의 성리학을 국시로 삼는다. 그 후 조선에 가서는 이성계의 반란을 도운 정도전과 그 세력들을 성리학적 사대주의를 외교의 근간으로 삼는다. 유교적 전통을 기본시하는 유림은 조선조에서는 정치 외교 및 군, 현의 통치의 기본법으로 제정하여 백성들을 핍박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 1627년 병자호란 1636년 정묘호란 세 번의 국란을 치르면서 양반의 사대부는 백성들에게 신뢰를 잃게 된다. 조선 후기 17세기에 양반사회가 가진 권력에 대한 갈등이 팽배할 때 실학이 등장한다. (실제 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학문) 서인들의 정치적 싸움에 남인들은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흩어져 숨어 살게 된다. 남인 사대부의 학맥 혈맥으로 뭉쳐져 하나의 사상을 받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을 당한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아람샬' 로부터 서양의 문물과 천주학을 들여온다. 우리나라 실학과 천주학이 만나면서 천주교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천주교를 처음 접한 백성들은 종교를 떠나 하나의 학문으로 사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1784년 최초 신자인 이승훈 신자가 '그라몽' 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고 3월에 귀국하여 책을 연구하고 신상공동체를 구성 발전시킨다. 이것이 우리나라 천주교의 시작점이 아닌가 싶다. 
자세한 이야기는 금산문화원 대둔산 마을 이야기 김선주 편에 있다. 

금산 지방이 천주교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 큰 획을 가진 것은 우리나라 천주교에 역사적 흐름과 윤지충, 권상현 이라는 첫 순교자가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를 당하고 진산면 지방리에 산소를 쓰게 된다. 그 곳에 진산성당을 건립하여 두 분에 순교에 대한 긍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자리하기까지 많은 탄압사건과 많은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을 것이다. 

◆천주교 탄압사건
1791년-신해박해 사건(윤지충, 권상현의 폐제분주 사건, 윤지충 어머니상중 신주소각)
1794년-을묘사옥 사건 
1801년-신유박해 사건(이승훈 등 300여명이 처형 당함)
1839년-기해박해 사건 
1846년-병오박해 사건(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포교하다 처형)
1860년-경신박해 사건 
1866년-병인양요 
1868년-무림사옥 
1871년-신미사옥 등 당시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정과 갈등을 겪어 80년에 걸쳐 박해를 받는다. 

금산의 천주교는 모든 시작이 진산과 맞물려 있다. 금산에 제일 먼저 천주교가 자리를 잡게 된 곳이 진산이고 윤지충은 진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 선포자가 된다. 윤지충(바오로)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과 인척 관계였다. 1784년경 고종사촌 정약전의 집에 방문하여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정약전의 가르침을 받아 1787년 이승훈으로 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첫 신자가 된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외사촌 형 권상연(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때 만 해도 성당(교회)이 없어서 신부님이나 신도들이 찾아가 예배를 보는 공소가 있을 뿐이었다. 

1791년 금산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가 사망하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다가 신주를 모시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으나, 유교제사에서 중시하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당시 유교 문화를 국시로 삼았던 조정에 의해 1791년 11월 12일 전주에서 참수치명을 당한다. 천주교가 생긴 이후 공식적인 첫 번째 순교인 것이다. 두 분의 시신은 진산면 막현리에 묻힌다. 

진산 사건 이후 대둔산 자락은 신자들의 피난처로 자리 잡는다. 1791년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이 고산 지구지(전북 완주군 운주면)로 이주 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각지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고산지역 신앙공동체는 대둔산 줄기를 따라 진산으로까지 번져간다. 장대원이 1812년 이전에 이주한 금산의 솔티(남일면 신정리)가 신자들의 교우촌 이었던 것을 보면 이 지역에서 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일찍 내렸는지 짐작이 간다. 금산의 신자들은 고산지역 신자들과의 교류 안에서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오는 신자들을 통해 계속 신앙생활을 영위해나간다. 
금산 성당 90년 기념사업 사업회에서 책을 발간하게 된다. 편집위원장 송별용에게서 자료를 받아 금산 천주교에 발자취를 찾아본다. 

◆금산공소의 역사
1884년 소라니공소(금성면 삼가리)를 시작으로 진산 복수 남이면으로 박해를 피해 따돌린 신자들이 산골짜기 마을로 다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1891년 되재본당(전북 완주군 승치리)이 설립되자 우도신부(1891~1893), 비에로신부(1893~1897), 미알롱 신부(1897~1906), 베트몽 신부(1906~1910)가 차례로 되재본당 신부가 되어 금산지역 공소를 방문한다. 대부분 공소들이 폐기나 통합과정을 거쳐 소멸되거나 하였다. 가새벌 공소(진산면 지방리)는 꾸준히 성장하여 금산 본당의 모체가 된다. 

금산 본당의 설립 과정은 금산성당 90년 기념 책자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1914년 3월 1일 부의 폐합으로 진산군이 면으로 강등 되면서 금산군에 병합이 된다. 읍이 없고 10개면이 금산군을 형성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 금산면이 금산읍으로 승격되며 1읍 9면이 된다. 
1929년 5월 25일 가세벌 공소가 이 지역 행정명칭에 따라 지방리 본당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1931년 5월 10일 지방리 본당이 2년의 짧은 기간을 뒤로하고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공소로 환원된다. 

본당의 지위를 잃은 지방리 공소는 사회변동과 더불어 발전해 가는 금산읍에 모든 것을 내주어야 한 것 같다. 
중요기관들이 금산에 설립되고 교통 행정 문화의 중심이 금산으로 옮겨짐에 따라 진산공소에 위치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쳐 금산 읍내가 본당의 중심지로 선택된다. 
금산의 천주교는 윤바오로(지충), 권요한(상연) 두 분의 순교가 있었기에 더욱 소중하고 숭고한 것 같다. 지나온 세월의 역사에는 우리 모두 소홀한 부분도 있어 이제라도 금산의 천주교와 진산성당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발굴, 보존하여 앞으로의 천주교의 모든 분들에게 가슴으로 고히 모셔야 할 정신적인 기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많이 가르쳐 주신 송별용 편집 위원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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