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의 동학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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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의 동학농민 운동
  • 새금산신문
  • 승인 2019.10.0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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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장 호 금산문화원장
장 호 금산문화원장

1894년 3월 8일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조선 왕실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제원역(지금의 제원초등학교)에서 무장봉기를 한다. 동학교도 조재벽과 서장옥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과 함께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금산읍 관아로 쳐들어가 평등사상과 보국안민을 실현하기 위한 폐정개혁을 요구한다. 
금산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동복 이사장님이 정리해놓으신 「의로움의 금산 정신을 구현하는」 학술발표회에서 금산의 유학과 성리학, 진산 쪽의 역사까지 잘 정리해놓았다. 서장옥과 조재벽을 지도자로 수천 명이 동학교도 들이 모여 제원에서 3월 8일 봉기를 하게 된다. 이야면을 선봉장으로 금산읍 관아를 습격하여 향리 김원택과 보부상 등을 구타하고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관사 및 가옥을 불사른다. 
금산군수에게 폐정 개혁을 약속받고 인근 용담현으로 몰려가 동학농민군 개혁을 요구 관철시킨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이 이끄는 본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4월 1일 진산군 방축점에 최사문, 조재벽이 주동하여 동도소(지휘소)를 설치하게 된다. (이때에는 진산군과 금산군이 나누어 졌다가 1914년 3월 1일 부(府)의 폐합으로 금산군과 진산면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된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위기를 느낌 금산의 양반과 보부상 향리 등 보수 세력이 4월 2일 보부상 김치홍, 임한석 등과 관군 1천여 명이 진산 방축점을 공격하여 농민군 114명을 살해한다. 금산의 농민군은 전라도 부안으로 이동하여 전봉준 본대와 합류하여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한다. 이후 동학 농민군과 조선정부가 전주에서 화약을 맺는다. 전라도 각지에서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통치 권력을 장악하고 부패한 행정을 개혁한다. 
금산에서도 5월 15일 집강소가 세워지지만 오래가진 못했으며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청일전쟁 발발 등 외세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빌미를 만들어 준다. 
5월 중순 이후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민보군이 결성되고 금산 지역 치안을 장악 한다. 전군수, 정숙로를 우두머리로 향리 정지환, 보부상 우두머리 김치홍, 임한석이 주축이 되어 금산은 민보군이, 진산은 농민군이 장악하여 10월까지 대치를 한다. 
일본군의 침략적 행동이 심해지자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 9월 18일 최시형의 기포령과 함께 전국에서 농민군이 재봉기 하게 된다. 전봉준과 서장옥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공격을 위해 논산에 집결할 무렵 진산의 동학농민군은 청주로 북상하는 농민군의 진로를 열기 위해 금산공격에 나선다. 
김개남 농민군과 민보군은 송원재(소라니래 현 금성면)에서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다. 동학농민군의 승리로 민보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금산으로 퇴각을 한다. 금산마저 접수한 농민군은 민보군의 지도자 정숙조, 정지환, 정두섭, 한규홍 등을 처형한다. 이 후로 부터는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지점이 되어 중요한 이동통로가 된다. 
11월 27일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역사에 남는 전투가 시작된다. 이때 금산도 11월 8일 영동 양산에서 크게 이긴 일본군이 11월 9일 오후 금산으로 들어온다.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고산과 용담으로 후퇴를 한다. 
금산을 접수한 일본군을 11월 12일 진산도 접수하고 13일 공주우금치로 빠져나가 공주 우금치, 이인과 효포에 진을 친다. 남접 전봉준과 서장옥은 논산에서 집결하여 서울로 향한다. 충청감사 박제순의 보고로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한다. 먼저 동학농민군은 계룡산 뒤편 판치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공격한다. 판치를 내준 관군이 우금치에 있던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를 하자 동학농민군이 우금치로 공격을 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7일간 50여회에 가까운 격전을 치르면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참패를 한다. 순창으로 숨은 전봉준은 12월 30일 습격을 받고 붙잡힌다. 이듬해 4월 23일 김덕명, 최형남, 손화중, 성두환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를 한다. 
금산과 진산에서 패한 농민군과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대둔산 미륵바위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에 항전을 한다. 대둔산 북쪽 염정골로 이동한 동학농민군은 1895년 1월 28일 민보군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금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그 시대에서 분명히 큰 역할을 하였으나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남접 전봉준의 역할에 크게 두각 되지 않아 보인다. 
지도자 서장옥 지휘 아래 이루어진 금산 제원 봉기가 재조명 되어야 할 것이며 금산에 동학혁명 최초봉기라는 명분보다 남접 전봉준, 서장옥으로 대변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명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는 금산의 동학농민 혁명을 맨 처음 전라도가 아닌 금산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봉기 원인이나 역사적 배경 혁명기간 활약상으로 볼 때 서장옥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현 정읍)와 무장에서 시작으로 임금이 계시는 서울로 올라가다 공주 우금치 까지 활약한다. 
서장옥 선생은 제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 두령들을 휘하에 두고 전라북도와 충청도까지의 행동반경을 두고 있다. 서장옥이 불교도 스님이었다가 동학교로 옮겨간 과정은 더 찾아보아야겠지만 1대 교주 최제우, 2대 최시형과 같이 동학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조신원운동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최시형 교주의 집단 거부로 서장옥 선생이 주도로 공주, 삼례, 보은 집회를 주도했고 광화문 복합 상소까지 추진하였다. 
서장옥 선생이 주도한 금산, 진산 농민군 봉기는 단순 민란이 아닌 동학농민혁명의 기본 틀이 되는 역사이기도 하며 금산군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서는 서장옥을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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